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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청춘

sustine 2012. 11. 10. 04:05

 

 

 

 

 

그늘의 힘, 축 늘어진 하늘, 축축한 공기, 젖은 땅, 건조한 살결, 너의 그늘, '너'를 찾으러 가다 

그 곳에는 김애란의 문체, 시적인 서사로 밤하늘을 가득 메우다

그녀의 그늘에서는 무엇하나 생명이 아닌 생명이 없다

그 소리, 그 빛, 그 냄새, 그 자리, 그 속도, 그 호흡, 그 시선, 그 말 없음의 말, 행위 이전의 서사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ㅡ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 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 것은 의당 그래야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그것은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지 낀 유리 너머로 소리가 삭제된 채 보이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p.86

 

 

물이 담긴 봉투는 둥글게 밀봉돼 아버지 방에 저장됐다. 큰 그릇은 바닥에, 작은 건 책장과 책상에 올려졌다. 전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내부가 투명하게 비치는 봉지는 부화를 꿈꾸는 외계의 알처럼 빛났다. 혹은 동물의 장기에 붙어 있는 수포나 종기 같아 보였다.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의 방엔 차곡차곡 물 봉지가 쌓여갔다. 그리고 그 속에선 이따금 조용히 기포가 피어올랐다. p.92-93

 

 

시간은 이미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세계는 전보다, 또 방금 전보다 검게 짙어져가고 있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모른 채 지금 막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청년은 생전 처음 겪는 추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기 신랑이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거라 밎는 베트남 처녀는 목을 길게 뺀 채 마중 나온 한국 남자를 찾고 있었다. 늘어난 비행기 대수나 자연 감소분만큼 인원을 충원하지 않아, 점점 피로해져가는 한 비행사는, 조금 전 유니폼 단추가 떨어진 징조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고.

출장 뒤 부정(不淨)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아내에게 줄 스카프를 산 중년 남성은 면세점 카드기기에 이제 막 서명을 하고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이란 속담의 뜻을 막 '터치'하고 있었고..... 근처 유흥가 한복판에서 두 팔을 번쩍 든 파키스탄 사내는 '부대찌개' 네 글자가 쓰인 판자를 벌 서듯 들고 있었다. 드넓은 활주로에는 비행기 이착륙 지점을 밝히는 수천 개의 항공등이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그리하여 퀭한 눈을 한 여자가 두건을 쓴 채 여객 터미널 화장실 바닥을 닦는 이 밤. 추석에도 마트에 나가야 되는 엄마를 둔 한 초등학생이 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18. A마트, 내일 하루 종일 정전돼서 좆망해라'라고 게시글을 쓰는 사이. 탑승 게이트 곳곳에서는 '사요나라' '톳진스(Totziens)' '굿바이(Good bye)' '잘 가' 그리고 '안녕'이란 말이, 전화하겠다는 말, 편지한다는 말, 그만 들어가라는 말, 울지 말라는 말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추석이 내일이었다. p.202-203

 

그래도 누군가 그렇게 저한테 어려움 없이 안기면 개들과 결코 오래 볼 사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슴 한쪽에 슬며시 온기가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왜 물이 한가득 든 투명한 비커 안에 스포이트로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아름다운 뭉게 구름이 생기며 액체의 성질이 바뀌게 되잖아요? 그때 제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작은 배려나 선의 하나에 쉽게 흔들리고 감동하고 저 역시 가능하면 조그마한 답례라도 하고 싶어졌으니까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296-297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p. 316-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