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비밀의 화원
- 얼마를 벌어야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나의 갈증은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해도 그때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테니까. 다만 나는 올해 어머니 칠순 때도, 성북동의 조금의 비싼 음식점에서 잔치를 해드릴 수 있을만큼의 돈이 내게 있길 바란다. 변함없이 출퇴근길로 애용하고, 그곳에 서 있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집들을 보며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길 여전히 꿈꾸고, 어린 시절 누이들과 다녔던 추억을 아스라이 되새기는 그곳 성북동에서.
사람이 일평생 유년의 기억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그리움에 젖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으로만 보면 불행일 것이고,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또한 행복일 것이다.
p70
- 같이 일했던 작가 언니가 그러는데 난 별로 똑똑하지 못하대. 일이 터지면 어디에 줄 서야 하는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그냥 주저앉아버린다나.
인생이 내 편을 만들어가는 게임이라고 한다면 난 히딩크가 되진 못할 거 같아. 그러기에 난 너무 더디고 또 많이 서툴거든.
한때는 이른바 '처세'라는 걸 잘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적도 있었지.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편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하더라구.
너무 약삭빠르게 처신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인지도 몰라.
p139~140
-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을 수십 개씩 쌓아놓고 나누던 긴긴 통화가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흘러가던 그때,
어느 날 전화기를 통해 귓가에 들려온
한마디는 내 온몸을 감전시켜버리고 말았다.
"사랑해."
몰핀을 얼마나 맞으면 그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까.
철없을 적 들려왔던 사랑의 말들은
그토록 놀랍고도 강력한 것이었다.
'보고 싶어' '좋아해' '사랑해'
아무런 의심이나 회의 없이, 정말로 순수하고 영원하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고 믿어 의심치 않던 순간들이 그립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듣는 사랑해, 라는 말은
여전히 애틋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그 말 속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참 희한한 일 아니냐.
사랑한다는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는데,
p143
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p144
- 어렸을 때, 왜 함께 사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고 떨어져 사는 자식들은 예쁨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내며 집안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잠을 못이루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과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커다란 볼륨으로 마루와 온 방 안의 티비를 켜놓은 채 생활하는 아버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그런 일상의 불가항력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슬프다. 떨어져 사는 누나들은 그런 일상의 부대낌 없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겠지. 나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더라면 더욱 잘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아침부터 떠들썩한 티비소리에 잠이 깰 때면 어떤 때는 발작을 할 것만 같다.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기 떨어져 혼자 살아야만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어머니로 이어져왔던, 이 함께 살기 때문에 생길 수 밖에 없는 미움의 사슬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선 어떡해야 하는지, 나의 부모만큼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좀 더 행복하고 따스한 기억이 가득했으면 하는데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알고 싶다.
p182
- 나는 희망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무섭다. 희망 이후의 세계가 두렵기 떄문이다. 절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혹여 운 좋게 거기서 벗어났다 한들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은데, 세상엔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가보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인생이 고달프다고 한다. 사람은 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어서 '나에게 허락된 것이 이만큼이구나'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제명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산다는 건 그저 약간의 안도감을 가지고 시내 대형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가족 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없는 것, 빚쟁이들의 빚 독촉 받을 일이 없는 것, 먹고 싶은 라면을 지금 내 손으로 끓여먹을 수 있다는 하찮은 것들뿐이라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의 크기가 결코 작은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체념에서 비롯된 행복이라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하고 싶은데 그 모든 욕망들을 어쩔 수 없이 꾹꾹 누르고,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화에 일찌감치 백기를 든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
p192
- 사람을 사귄다는 것에 대해 여전히 고민하던 어느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술을 마시며 진행하는 취중인터뷰였죠. 애초부터 술자리였던 만큼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자리는 계속 이어졌는데 그 기자는 저에게 말을 놓자고 하면서 오늘 끝장을 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이기도 하거니와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친한 친구와도 그러질 않는 내가 그 사람한테 굳이 맞춰줄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나는 적당한 선에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기자는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압니다. 내가 만약 그 기자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주며 술 상대를 해주었다면 그때부터 우린 친한 사이가 됐겠지요. 하지만 저는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게 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밤을 새자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강요로 받아들여질 뿐입니다. 결국 저는 그 기자의 인맥리스트에서 제외되고 말았고 그것은 가뜩이나 없는 연말 망년회 때 참석할 자리의 수가 또 하나 줄어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즉 나만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였습니다. 나로선 내가 부당한 요구를 당했고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관계에 있어 어떤 불이익을 보게 되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손을 내민 것뿐인데 그만 거절을 당하고 만 것이죠. 그는 과연 상처받지 않았을까요? 이렇듯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친구가 많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 일종의 사교의 룰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방식들이 도통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여기거나 그 의도 또한 순수하지 않게 여겨 회의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원치 않는 상황을 견뎌내야만 친구가 생기고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인가?' 하는 고민 속에 때로는 노력을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체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느끼는 자신과 세상의 문제가, 자신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일이 아님은 결코 깨닫지 못한 채.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지간이라는 것은 마치 연애하는 남녀 사이만큼이나 복잡 미묘했고, 관계 또한 수평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남녀 사이에도 더 좋아하는 사람과 덜 좋아하는 사람 간에 권력관계가 형성되듯이, (당연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고 덜 좋아하는 사람이 강자가 되겠죠) 친구끼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날 나는 내가 가장 친하다고 여기고 있는 친구와 나와의 관계가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수평적인 사이라면 나는 친구의 태도에 부당함을 느꼈을 때 정당히 어필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 관계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죠. 다시 말해 내가 친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혹여 그것이 나의 피해의식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쪽에서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을 만큼 그쪽에게도 내가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따져보니 그다지 유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떤 겁니다. 판단컨대 친구는 나의 항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관계는 그 즉시 깨어질 만큼 신뢰와 유대는 약했으며 그저 내 입장에서만 더 아쉽고 구차한 사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 해도 관계를 쉽사리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만큼 여러 환경적, 상황적인 이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친구가 내가 속해 있는 무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만약 그와의 관계를 포기했을 때 나의 위치는 덩달아 어떻게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나의 생활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고민 같은 것들 말입니다.
p213~215
- 순간을 믿어요
어떤 이가 나에게 너는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하고 물어 이런저런 것들을 해주고 싶다고 했더니 "거짓말!" 한다.
다시 그가 나에게 정말 마음이 변치 않을 수 있는가 또 묻기에 나의 마음을 열심히 설명했더니 이번에도 "거짓말!" 한다.
잠 못 이루며 끝없이 의문을 던지는 그에게 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네가 뿌리내릴 수 있는 땅이 되어줄 거야."
그 말을 들은 그는 비로소 안심하며 잠이 들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나에게 뿌리를 내려갔다.
p282
- 공개일기 쓰는 법
감정이 글을 압도하게 되면 정작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글은 현실과 달라서 눈물의 양이나 표정의 절박함,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내주는 진정성 등을 확인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 슬퍼죽겠다, 라고 되뇌는 것만으로는 감정의 울림을 갖기 어려운 탓이다.
결국 슬프다는 나의 감정 상태를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으려면 내가 왜 슬픈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흡인력 있게 서술해야 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 혹은 최소한 흥미라도 갖게 하기 위해 그것이 글쓴이 개인의 사적 경험을 단지 서술, 나열한 것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슬프다' 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여기서의 다른 장치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생각'이다. 사실이 아닌 생각을 담는 것).
'오늘 <펠헴 123>을 보았다. 압구정동 시네시티에서 보았다.
강남에 있는 극장치고는 시설이 안좋았지만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했다.'
누가 남의 이런 단순 일상을 알고 싶어하겠는가.
개인적인 일상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장치로서 나는 하나의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화두를 던지려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대화 역시 나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난 덴젤 워싱톤이 싫어. 왜냐면 그는 잘생겼지만 지루해. 배우인데 '색기'가 없거든."
"아니, 왜요? 덴젤 워싱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
"연기 잘해도 '색기'가 없으면 딴따라는 지루해. 윌 스미스를 봐.
얼마나 매력이 넘쳐."
"난 덴젤 워싱톤 섹시하기만 하더라."
"그래서 니가 감각이 없다는 거야. 니가 '색'을 알아?"
세상은 자기만 알고 있어도 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굳이 공개적으로 쓸 때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너그러움과 호기심을 갖고 대해준다.
p368~372
- Au Revoir
억만겹의 사랑을 담아, 너에게.
- 소피아 왕립 예술센터
다시 가서 꼼꼼히 한 층, 한 층 둘러 보고 싶다.
길을 잃어 겨우 찾은 이 곳은, 끝나기 한 시간 반? 전에 도착했던 기억..
프라도 미술관도 좋았지만, 이 곳의 작품들이 더욱 흥미로웠다. 매력에 빠졌다. 아직도 그 때 느낀 전율을, 잊을 수 없다.
- 오늘 <걸어서 세계속으로> 티비 프로그램(김C의 나레이션, PD가 쓰는 글, 담는 풍경, 배경음악..감동. 정말 좋아)을 보는데 슬로베니아가 나왔다.
가고 싶어졌다.
여행병이 다시 생기려나 보다.
슬로베니아. 소차 계곡, 블레드, 아드리아해 지역, 루블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