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의 황금기
학교를 가고 싶어 준비하던 작년 가을, 합격 소식을 들은 날부터 내 시간은 불안으로 잠식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짧게 하고 그만 두고 그 때부터 쭉 내 욕심인 대학원을 갈 생각으로 살아왔다.
응원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기에 밀어 부칠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나아갔던 걸까.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분명히 또렷하다.
당분간은 멍-하게 사는 일이 나한테는 당연한 일인마냥 죄책감을 느끼고 살고 싶지 않다.
학교는 가지 못했고, 늘 불안하고 찝찝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무리하게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학교를 가야하는 건지 속상했다.
때가 되면 어떻게든 일이 내 쪽으로 풀릴 것이라는 헛된 상상을 지니고 살았다. 그럴 줄 알았다.
돈 때문에 못 간 이유가 가장 크지만, 무시 못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사람관계, 내 선택.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옳은 거라 생각했다.
등록기간 동안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락한 집에, 방 안에 누워있어도 눈치를 봐야 할 사람들이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볼 힘이 전혀 없었다.
살기 싫다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학교를 가서 배우고 싶은 마음은 굳건하지만 그럴수록 좋지 않은 집안 상황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많이 고생하면서도 나를 계속 위하는 엄마의 욕심, 내 욕심. 다른 가족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동의하지만 이상하게도 울컥한다.
12월…1월…2월… 결정을 뒤집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고 나는 그 때마다 도망치듯 아팠다.
집에서 나가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며칠 전에는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 영화를 봤다. 감독, 각본, 의상, 음악, 편집 모두 한 사람이 했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알았다.
감독은 나랑 동갑이다. 자비에 돌란. 심지어 배우이기까지. 로렌스 애니웨이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극대화시켜 표현하는 데 아주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영화다. 대부분은 사랑을 표현했지만 그 안에 얽혀 있는 복잡한 사람 내면을 밑에서부터 최고조를 끌어올리고 있다.
로렌스 애니웨이에 나온 음악들이 나는 정말 좋아서 지금까지 계속 듣고 있다. 감각이 살아서 오직 감각대로 흘러가는 느낌…
영화의 색은 일단 화려하다. 기쁠 때, 슬플 때, 분노할 때의 색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표현한다.
그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과 사는 집, 인테리어 등은 캐릭터 한 명 한 명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전체를 독특하게, 눈에 띄는 시선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바닥이 안보일 정도로 가라앉는 장면들이 폭발적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몸짓들이 영화를 아주 밝게, 아주 어둡게 만든다. 양 극단에 서서 감정들을 자유롭게 풀어헤친다.
이 영화를 보고 감흥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찌 이 감독의 재능을 무시할 수 있을까 싶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 순간들
을 무섭도록, 지독하게 끌어낸다. 편지를 읽으면서 여자의 머리 위로 폭포가 쏟아지는 장면. 여자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사소하
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문제 삼는 감독은 의식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을 표현한 배우들은 아주 깊은 곳에서 부터 끌어올려야만 하는 감정들을 표현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도 재미있고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에 이 영화는 나에게 좋은 유도체가 되어주었다.
조만간 영화를 한 번 더 볼 것이다. 징그럽고, 반항적이고, 무지막지하게 사랑스러운 영화. 자극적이지 않은데 꽤 깊은 곳을 만지는, 자극적인, 의식 있는 영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은 말로 못하는 쓸쓸함을 안고 사는 일 같다. 누군가에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된 문장이 아니라 자
신만이 알고 있는 직감적인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 고리. 풍경이거나, 또 다른 사람이거나. 술집에 혼자 앉아서 시비거는 사람과
싸워야 하는 일이거나. 세상의 모든 낙엽이 흩날리는 것 같은 거대한 폭풍우거나. 고독한 싸움은 각자 자신만의 길로 승화시킨
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는 일, 시를 쓰는 일,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행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
랑을 버린다. 그리고 영원히 내 것이 된다. 나에게 미쳐가는 일. 사랑의 한 이면이다.
요즘은 자의식에 대해 생각한다.
자의식에 빠져 있는 내 상태를 돌아 본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아닌. 자의식의 황금기.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 상태인가. '나'만 생각하느라 내가 가장 싫어지는 동시에 내가 존재할 수 없는 환경들을 저주하는.
자의식이 강해지면 방어기재가 높아지고 나를 제외한 다른 것들에 분노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분노를 풀게 되면 그것들이 다시 나를 공격한다.
그리고 무척 예민해진다. 원래 예민한 성격을 지닌데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며 나를 싫어하고 있을 것이라는
고집 센 촉수를 세우고 예민하게 군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문제들인데 혼자서 날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네가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도 예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합리화를 잘 시키고 책임감이 없으며 돌아서는 데 익숙하다.
자의식이 장악하면 자존감이 높아진 것처럼 보이나 금방 식어 무너진다.
나에게 자신감은 자만심과 아주 가까운 것이기에 실수를 할 것을 알기에,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남을 도울 줄 알고, 동정할 줄 알며 이것을 자신을 내세우는 데 이용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동정이라는 단어를 낮게 취급했는데, 말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동정'은 사랑보다 우위에
있는 한층 높은 개념이라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동정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동정은 불쌍하다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신이 어루만질 수 있는 신성한 것이라고 해야하나…
IF I HAD A HEART, A NEW ERROR, 음악을 들으니 파도 소리를 직접 들으러 가고 싶어진다.
삶은 여행-이상은 노래를 꾸준히 듣고 있다.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나는 용서하는 일이 먼저인 것 같다.
내가 용서를 게으르게 내버려두었을 경우 자유는 내 곁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상태만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