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가끔 생각하지,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구십이 넘어 연가 한 편을 꼭 쓸거라고

 

  글쎄, 그 하루 하루

  그대와의 시간을 어떻게 나는 시로 쓸 수 있을까

  눈부시게 담담하게 지워져간 그 시간

  낡은 일기를 들여다보며

  하루 먹어야 할 통증의 알약을 넘기며

  아마도 기억나는 만큼만

  잊힘에 새겨진 일렁이는 무늬만큼만

  나는 쓸 수 있겠지

  나를 일으켜주던 간병인은 말할지도 몰라

  오늘 얼굴 환하세요 꼭 새색시, 같으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하겠지

  오늘은 구십 년 동안 기다려온 연가를 쓰는 날이라오

 

  언젠가 그대가 그대의 가난 속에 있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혹은 가난의 굴욕을 보여주며 슬몃, 짧게,

  미안해요, 라고 했을 때

 

  낯선 도시 좁은 골목에서 여관에 갈 돈이 없어

  껴안고 최소한만 서로를 만지고 있었던

  부끄러움을 알던 연인들

  그들을 안아 주었던 눈

  그 때 그 눈, 마치 그 연인들만을 위해서 내리는 것

  같다고 내가 말 할 때

  우리 더 불우해지지는 말자, 고 그대가 어깨를 내어주던

순간이 있었다고

 

  계절이 지나가면서 색깔을 나에게 가르쳐 줄 때

  그대는 하얀빛이었다가 푸른빛이었다가 붉은빛이었다가

  아니면 그 모든 색깔을 사유하던 시간의 첫머리였다고

  내가 지워지면서 그대가 스며들어오고

  그대가 지워지면서 내가 스며들던 그 시간 동안

  우리가 같이 올라 갔던 산과 같이 서 있던 정거장과 먼 사원이

  전쟁터였다고 아니면 별이 탄생하던 산부인과였다고

  해가 지던 풍경이 우리 발을 건드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살 수 없이 만들었다고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구십 살이 된 연가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끌려간 시인을 위해 술을 마셨어요

  우리는 굶어 죽은 소들을 떠올렸어요

  감옥과 철거된 옛집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던 고지대와

  전기가 끊긴 문명의 골목을 안으며

  우리는 삶의 주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대가 내 옆에 있을 때

  길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이방의 건축가가 건설한 도시가 보고 싶어서

  우리는 자주 그곳 날씨를 그리워했다고

  그대가 내 옆에 있을 때

  우리가 했던 모든 착각 그리고 착란만은

  우리의 것이었다고

  인간이 만든 제도 속에 살아낼 수 없었던 우리와

  배가 고픈 생활인인 우리가

  태양 속에서 방랑을 계속하는 중이어서

  밥벌이의 골목에서 만난 시든 채소들은 아렸다고

  고요하게 썩어가던 조개에서 나던 냄새는

  상주 없는 제사처럼 쓸쓸했다고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힌 과일가게 앞에서

 

  백 년 전에 사랑에 빠졌던 어느 시인의 시를 생각하며

  우리는 장님이 되었노라고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아직 뭔가를 쓸 수 있는 구십이라는 나이가 나에게 있다면

  나는 그대의 무엇을 가장 마지막까지 쓸까

  어느 순간에는 영원 같은 어긋남의 빛이 있어

  그림들 속에 숨겨진 웃음과 울음은 서로 안아주었다고

  헐거운 노래를 허밍하며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

 

  나는 나의 늙은 안경을 벗으면서 바깥을 바라볼 거다

  천천히 멈추었던 가을의 탱고가 눈이 되어 흩날리면서

  내 늙은 이마에도 떨어질 때

  감성적이어서

  너무나 감성적이어서

  오늘 적었던 연가를 내일 읽으면

  얼굴은 붉어지겠지

  그러니 아주 마지막 날에 이 연가를 써야겠다

 

  쉿, 아직 봄이 오지 않았어요 깨어나지 마세요 이 세기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을 지켜주던 신은 도둑을 지켜주던 신이라는 거, 잊지마세요

 

  아, 나는 모르겠네

  구십이 되어 나는 그대가 먼저 간 길을 아주 오래 보다가

  이렇게 쓸지도 몰라

  저녁은 갑자기 오더니 어둠은 천천히 오시네, 라고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데 세월은 이만큼 가서

  뒤돌아보니 갑자기 저녁은 도착했고 밤은 그대의 고요한

손처럼 그렇게 천천히

 

  오늘의 바람은 그다지 거칠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 이라는 단수가 되고 싶었으나

  우리는 사람들, 이라는 복수였다고

  그리고 끝내 사랑, 이라는 단수 유랑자였다고

  그 시간 동안 나의 개, 천년이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나는

  떠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착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