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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옆에 핀 야생국화는 하염없이 꺾이고 그 자리에서 바람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어쨌든 우주도 나를 돕겠지

 

최근(2012년)에 헤밍웨이 작품들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그의 책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찾아서 헌책방을 전전했던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제일 먼저 읽고 싶었던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노인과 바다도 아니었다. 늘 헤밍웨이를 다시 읽는다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1989년 영문학과 신입생으로 입학해서 처음 공부한 영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올해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영문학과 교수님들이 얼마나 고심 끝에 이 소설을 골랐을지 그 마음 씀씀이가 뒤늦게 느껴졌다. 신입생 시절에는 하얗게 수염을 기른 헤밍웨이의 사진 때문이었는지 이 소설에 나오는 제이크나 로버트의 이야기를 내 또래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른다더니, 이 소설 속 청년들도 자기가 얼마나 젊은 줄을 모르고 밤새 파리의 술집을 쏘다니는데(하긴 그것이야말로 젊음의 곡예겠지만) 나도 이제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젊었는지 깨닫는다.

 

 "내 인생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 있는데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

 "투우사 말고는 인생을 최대치로 사는 사람은 없어."

 "투우사는 관심 없어. 그건 비정상적인 삶이야. 난 남미 시골에 가고 싶다고. 굉장한 여행이 될 거야."

 "영국령 동아프리카에 가서 사냥을 하는 건 어때?"
 "아니, 그런 건 싫어."

 "거기라면 같이 갈텐데."

 "아니, 그건 흥미 없어."

 

 이 부분을 읽으니까 최근에 본 다른 책이 떠올랐다. 스스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생을 바꾼다는 주장을 펼치는 <스토리>란 책으로 '목적의식 유지'라는 제목 아래 스누피 만화의 한 부분이 일례로 등장한다. 만화에서 샐리는 즐겁게 줄넘기를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왜 그래?" 친구 라이너스가 묻는다. 샐리는 대답한다. "난 줄넘기를 하고 있었어.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순간....... 나도 모르게 .......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였어." 내 생각에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 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그때 제대로 산다고 본다. 우리가 자꾸만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건 그 때문이다. 회사원은 사장을 원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혼을 원한다. 정말 멋진 사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사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계발서에 써 놓은 것처럼,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원하지 않고 20대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럼에도 20대가 끝날 무렵에 우리는 대부분은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찌질하며, 자주 남들에게 무시당하며,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결과를 얻는 것일까? 그러니 20대 후반이 되면 우리는 모두 샐리처럼 울 수 밖에 없다. 그건 아마도 20대란 씨 뿌리는 시기이지 거두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청춘이란 단어에 '봄'의 뜻이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겠지.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니까.

 그러다가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라는 책을 읽는데, 책을 쓴 바버라 스트로치와 52세의 직장 후배가 20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스무 살이 되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라는 건 정말 끔찍했어요. 끔찍했다니까요." 맨해튼의 거리를 가로지르며 에리카가 말했다. "이젠 저도 알아요. 나이가 드니 상실을 맛보게 되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조금 더 걸었다. "하지만 있잖아요," 그녀가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묘하지 않아요?"

 묘하지 않다.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대에 나는 세상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20대 후반이 되어서 나는 내가 그다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통렬하던지 나 역시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스무 살이 되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라는 건 정말 끔찍했어요"라고 말 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건 스무 살의 잘못이 아니다. 우주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20대에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만 하는지를 몰랐을 뿐이다.

 20대가 지난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렵지만,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내가 쓴 최고의 글일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최고의 작가가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최고의 글을 썼다.

 간절히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기 위해서 온 우주가 움직인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우주는 내 소원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소원을 말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202p.~207p.

 

 

 

 

 

 

 

 

 '아름다운 계절, 또 중양'이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송나라 시절에도 또 돌아오던 중양절, 음력 9월 9일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지난 10월 19일이었다. 내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어김없이 중양절은 다시 찾아오고 국화꽃은 만발할 게다. 그리고 그렇게 중양절은 다시 찾아오고 국화꽃이 만발하면 이 시를 지은 송나라의 여류 시인 이청조처럼, 혹은 이 시를 읽고 난 뒤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누군가는 황혼이 진 뒤에 혼자 술을 마실 것이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삶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인생의 모든 순간은 딱 한 번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영영 멀어진다.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그저 "아름다운 계절 중양절이 또 돌아왔군요"라고  노래하는 이유는 지나간 순간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이니까 그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하지만, 또 나를 일깨우기도 한다. 나뭇잎이 또 저렇게 졌다가 봄이 되어 다시 돋는 동안, 사람들은 한 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자명한 사실 앞에 지금 단 하나의 가을이 놓여 있다. 그러니 이 가을 앞에서 나 역시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라고 노래할 수 밖에. 61p.~6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