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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지기 전에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그림도 골똘히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길이 어긋나, 서로가 볼 수 없는 곳을 더듬는다.

 

 

 

부질 없는 심문과 대답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무섭거나 쓸쓸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 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 구걸하고 싶은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 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 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 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 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 지 확실하지 않았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 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베란다 바깥의 차가운 어둠을 오래 내다보다가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천천히 마른 세루를 한다.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밝아지기 전에',  한강

2012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

 

 

 

숨을 고르러 도서관에 갔는데 보물 같은 단편 하나를 만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학교도 이제 오늘부로 끝이 났다. 학교 다닐 때 종종 문예지 보러 들른 학교 도서관이었는데, 이제 아마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마음 먹고 가지 않는 한.

서울예대에 와서 나는 타과 학생들이나, 다른 이들이 갖는 자부심을 갖지 못했었다. 1학년 때는 그냥 무장적 방황했다. 스무살이란 나이 때문이었을까. 남들이 하자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많이 따라했다.  1년을 휴학한 뒤, 2학년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예대에 잘 왔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강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깊은 울림을 느꼈다. 한강 교수님의 목소리, 눈빛, 걸음걸이. 미소. 앉아 있는 자세. 작가의 문체는 작가의 몸과 많이 닮아 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한 공간에서 수업을 한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교수님이 선정한 책, 나눠주는 텍스트들, 그림, 야외 수업(연극), 합평 시간. 모두 나의 공감을 일으켰다. 그 시간, 그 수업들이 내게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언제였던가, 문학과 사회에 실린 '회복하는 인간' 을 읽고 오래도록 잔상에서 벗어나질 못했었다. 이 소설도 그러할 것 같다.

 

관찰하는 힘을 잊지 말고 쓰자. 계획한 일을 해내지 못했다. 사실 생각만 하고 시도 조차 안한 것이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까지 나는 조금 더 단단해 질 것이다. '부럽다, 닮고 싶다' 에서 끝나면 안된다. 망상에서 꿈으로, 꿈에서 실천으로.

 

늘 두려운 것이 많다. 당장 내일이 두렵지만, 넘어지고 실패해도 괜찮아. 괜찮을거야. 앞으로 나아가자.

멈춰있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