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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즐거움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 세면. 식사. 여자의 전보. 이곳은 아름답군요 언제 서울로 돌아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대의 소식을 두고 외출한다. 등 뒤에서 나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을 폐쇄하는 문. 여기가 문밖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물들. 아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 가령 담배꽁초. 보도블럭. 초로의 여자가 나누어주는 <일수돈 씀니다>.


어쩌면 몇 편의 죽음만으로 한 시대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종로 2가의 가로수. 종로 1가의 바람. 크로포트킨 공작이 무의미한 세계를 견디지 못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광화문의 바람. 가로수. 다시 바람. 정신분석은 지겹다. 십수 년 전 바움테스트에서, 나는 고의로, 부러진 나무를 그렸다. 의사는 치유할 방도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위약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와 친한 것들은 스스로를 오래 묵인하여 죽어가는 것들이다. 가령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열해 있는 간판들. 시월의 태양 아래 혼자 끓는 육체. 손차양 사이로 문득 햇살이 무심하다. 이순신 상 곁을 날아가는 지중해행 종이비행기. 생각난다.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긋한 색종이라도 접어 유장한 강물에 배 한 척 띄웠을는지, 그 배 지금쯤 멕시코만 어디서 좌초했을는지.


교보빌딩 화장실 변기 위에 달린 자동 감지기. 내가 다가가면 붉은 등을 켜는, 내 유일한 존재 증명. 그대가 서울에 없으니까 나는 죽도록 쓸쓸하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고 나는 전보를 치지 않는다. 거리에 도열한 간판들은 고의로 부러진 나무들처럼 고요하다. 또 위약이군, 중얼거릴 때 내 몸을 가볍게 통과하는 종이비행기.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



- 이장욱, 「투명인간













  지난 4월 중순,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한 통계 논문을 발췌하여 게재했다. 그 결론은 두 개의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5백 권 이상의 장서를 가지고 있는 집의 자녀들은 10여 권의 책밖에 없는 집의 자녀들보다 지능 지수가 더 높고 사회생활의 적응도 빨라서 자라면 더 좋은 직장을 가진다. 둘째, 책도 책 나름이다. 셰익스피어나 기타 고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특히 자녀의 성공률이 높다. 시집이 5백 권의 장서 중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으면 그 자녀의 성공률은 교양서적을 가지지 못한 집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못하다. 그런 집의 자녀는 방랑자나 몽상가가 되기 쉽고 현실 적응력과 그 경쟁력이 떨어져 사회생활에 부적합하게 되기 쉽다. 이 기사의 제목은 '시를 읽지 마라' 였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실용주의만 맹종하는 미국에서 왜 이런 공연한 수고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마디의 변명을 나름대로 붙여보고 싶었다.

  그렇다. 내 시를 읽어준 친구들아, 나는 아직도 작고 아름다운 것에 애태우고 좋은 시에 온 마음을 주는 자를 으뜸가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멍청이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자, 함부로 총 쏴 사람을 죽이는 자,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꽃과 나비에 대한 시를 읽고 눈물 흘리겠는가, 노을이 아름다워 목적지 없는 여행에 나서겠는가.

  시인이 모든 사람의 위에 선다는 말이 아니다. 시가 위에 선다는 말도 아니다. 나는 단지 자주 시를 읽어 넋 놓고 꿈꾸는 자가 되어 자연과 인연을 노래하며 즐기는 고결한 영혼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태껏 성심을 다해 시를 써왔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세상적 성공과 능률만 계산하는 인간으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겨우 한 번 사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꿈꾸는 자만이 자아를 온전히 갖는다. 자신을 소유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시를 읽는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마종기,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뒷면 전문 





* 매일 잠들기 전 시 한 두편씩은 읽고 잔다. 한 권씩 읽지 못하는 내가 초라하지만, 시가 주는 위안은 내 삶에서 큰 영역을 차지 한다. 

읽는 즐거움. 절대 포기 못하는 일이다. 대학 1학년 때, 소설창작시간은 유난히 두려웠다. 3개월 정도의 시 공부만 아주 짧게 하고 대학에 입학한 터라, 소설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써 본 적은 없었다. 소설 전공 문창과 학생들이 시 전공 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는 못쓸거야. 못해. 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한 차례 휴학을 하고 2학년으로 다시 학교에 돌아간 뒤로는 시 보다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교수님이 추천해 준 소설들을 찾아 읽었고 소설창작시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 한강 교수님 시간이어서 더 그 시간을 좋아했다. 시를 읽는 시간은 도서관에 들려 간간히 문예지를 찾아 보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소설을 써서 내는 게 목표였고 시는 예전에 입시 할 때 선생님과 수업했던 시들을 추려서 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한테 핑곗거리만 늘어났다. 오직 보여지기 위해서 남들을 속였고 나를 숨겼다. 시를 대하던 마음가짐이 청결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매미들이 쉼없이 울고 있다. 새벽 내내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늦은 오전이 되어서야 깨끗하게 잠잠해졌다. 하나의 울음으로 모든 것이 점철되던 시간이 명멸하고 있다. 청렴한 매미 소리. 여름이다. 다시 여름. 하나뿐인 오늘의, 이제서야 여름. 완벽한 날.들.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