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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소리쳐도 이야기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안다

 

        

 

 

- 어쨌든 이윤기 선생의 여러 말씀 중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 중에는 시장 아줌마들이 주고 받는 일상의 대화가 소설가들의 문장보다는 백배는 낫다는 말씀도 있었다. 선생이 시장에서 훔쳐 들은 바에 따르면, 어떤 집의 아들이 자살하자 아줌마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가 세상이 텅 비어 보였는갑다" 그러면서 선생은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는 소설가들의 대사들은 이런 식이라며 예로 들었다. "그 아이가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나봐요" 라거나 "그 집 아들이 절망에 빠져 더 이상 살기 싫었나봐요" 라거나. 나야말로 선생이 말한 그런 지루한 대사를 남발하는 사람이어서 그 말씀을 듣는데 속이 뜨끔했다.

 

그 말씀 덕분에 나는 문학적 표현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문학적 표현이란 진부한 말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걸 뜻한다. 결국 문학이란 남들과 다른,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걸 뜻하니까.

욕망의 말들은 꽤 진부한 편에 속한다. 욕망의 말들이 진부한 건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원하는 것은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해보라. 그건 문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일단 죽지도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진짜 사랑한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내가 욕망은 뜨거운 불꽃과 같아서 제대로 형상화가 이뤄지지 못한 종이 인물(영어로는 납작한 인물, 즉 'flat character'가 되겠다)은 그런 말을 입에 담다가는 단숨에 타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긴 오히려 그렇게 납작해진 것 자체가 판에 박힌 욕망의 말을 그대로 입에 담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욕망의 말들이 불꽃과 같다면 그 말들을 다룰 때는 안전장치가 필요할 텐데, 그게 바로 비유법이다. '이를테면' '말하자면' '가령' 등의 부사로 시작하면 비유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그 아 이가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나봐"라고 쓴 뒤에 여기에 줄을 긋고 '이를테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다시 쓴다. "이를테면 마음의 난 자리가 운동장만해졌다거나"라고 써도 좋고, "이를테면 그 아이의 삶이 어떤 방송도 잡히지 않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변했다거나"라고 써도 좋다.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뜨거운 내용도 담을 수 있다. 촌철살인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시피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비유법이라면 수사학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매 순간 상황과 사건에서 설득의 매개와 근거를 찾아내는 발견술이라고 썼다. '발견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한글 자모를 조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무한하지는 않다. 그러니 아직 조합되지 않은 표현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작가는 '이를테면' 언어의 발견술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김연수 '소설가의 일'이 연재되고 있다.

                                       

최근에 나온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산문집도 읽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