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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만남




내가 당신에 대해 처음 듣고, 당신을 처음 본 바로 그 순간을 마치 오늘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어떻게 제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비로소 저에게 세상이 시작되었는데요.

-슈테판 츠바이크 <낯선 여인의 편지> p.93.


고등학교 3학년, 열 아홉의 가을. 9월, 가을의 시작이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시간을 보낸 바로 직후였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충동으로 나를 억누를 수가 없어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철거에정인 주택들을 지켜보면서, 스러져 있는 풀밭들 옆을 지나쳐 오면서

신호등 두 개를 건너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한없이 앉아있는 나를 지켜보던 기억.

차도 옆에 서 있던 가로등에 불이 켜지기 까지의 그 시간. 

나를 무심히 밟고 지나가던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원망.

계속해서 무너지고 작아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나의 자존감은 추락했다.


막연히 대학은 가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고, 무슨 과를 가야할 지도, 어떤 대학을 가야할 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통증은 이어졌고. 엄마는 잊으라는 소리만 했다. 없었던 일이라고..



그러다 한 사람을 만났다.

엄마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글쓰기. 전문적으로 문예창작과 대학 실기시험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터닝포인트 같은 것이었을까.

그저 내게는 신세계였다. 처음으로 읽은 김기택 시집, 바늘 구멍 속의 폭풍은 충격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 온 뒤 쇼파에 누워서 읽은 그 시집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새롭다.

시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은 적이 그 날이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내가 읽고 쓰던 시는 '시'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만들어 준 시집.. 

선생님이 내게 내 준 첫번째 과제는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뽑아준 것. 읽은 다음 간단한 내 감상을 말했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꽤 많은 시집들을 단기간에 빠르게 읽어나갔고, 그 다음은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가 였다.  

고3 가을부터 겨울까지.. 나는 처음으로 시를 만났고,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선생님과의 첫만남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선생님과 나 둘이 부엌 식탁에 앉아서 내가 그동안 끄적이며 썼던, 시라고 생각했던 글을 보여주었고

선생님은 얼굴에 표정 변화 없이 이것들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이전에 것들을 지워버리고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자고 내게 말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수줍음이 있는 사람이었고 선생님이 나를 제대로 이끌어줄 지 확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을 잘 따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인생에서 정말 고마운 사람으로 남았다.


지금 나는 다시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

쉽지 않다. 그 때만큼의 집중력은 없어진 것 같고. 그 때처럼 나는 절박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잡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쉽게 지고, 아무렇게나 좌절했다.

나이를 먹고 있는 나는,  겁이 많아지고 용기를 내야할 때와 내지 말아야 할 때의 구분이 더 어려워졌다.


이틀 전에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다.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설렜다.

감출 마음도 없었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이 셀레는 마음을 지금 상태로 간직하다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에, 신분도, 소속도 확실하지 않은 나에게.

스물 한살 때처럼 망가져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또 아프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멀어지는 게 맞는 것이고.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지. 그저 가만히. 조용히. 죽은듯이 있어야 겠다고..


열정이 가득했던 때를 떠올렸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기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