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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과 12월 사이에 대한 기록











"고통이여 어서 나를 찔러라. 너의 무자비한 칼날이 나를 갈가리 찢어도 나는 산다. 다리로 설 수 없으면 몸통으로라도, 몸통이 없으면 모가지만이라도,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 나를 세워 놓더라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거야.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나는 어디도 가지 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어진 그대로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테야. 그래. 그에게뿐만 아니라, 내게 이런 운명을 마련해 놓고 내가 못견디어 신음하면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는 신에게도 나는 멋지게 복수할거야!"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보드라운 소파와 양탄자와 금칠을 한 벽난로와 비싼 그림과 쾌적한 침대 위에 세운다. 그런 뒤엔 그 물질로 해서 알게 된 쾌적한 맛에 길들여져 그들은 이내 물질의 노예가 된다. 그들의 갈망은 끝없이 쓰다듬는 손길에 의해서 잠을 잘 잔 말의 갈기와 같다. 하지만 내 정신의 갈기는 만족을 모르는 채 항시 세찬 바람에 펄럭이기를 갈망한다.'



- <먼 그대>  서영은



골을 허용한 이튿날 아침이었다. 내 기분은 뜻밖에도 아주 차분하고 상쾌했다. 내게 일어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간 밤의 그 무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엔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결코 나쁘지 않은 어떤 것이 감춰져 있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그것은 차츰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망루엔 통풍구이자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손수건만 한 창이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아주 작은 불빛도 어둠을 밝히는 힘이 되듯이, 그 창이 희망 없는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나날을 견디는 나에게 바로 그러했다. 

그 창문 방향에는 우리 집 안뜰과 옆집의 앞뜰, 앞집의 뒷담이 옹기종기 경계를 맞대고 있었으며, 더 멀리는 지붕들의 파도 너머로 자동차 길이 펼쳐져 있었다. 다락 밑의 부엌에서, 연탄 가스와 수증기가 뿌옇게 서려 있는 작은 부엌에서, 반백의 어머니가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 땀을 흘리며 하숙생의 점심을 짓고 있는 동안, 나는 바닥에 엎드려 (창이 낮아서 엎드리지 않으면 밖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 반쯤 울음에 젖어 그 작은 창문을 통해 햇빛 밝은 풍경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그러다 보면 나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 - 이를 테면 채송화와 분꽃과 봉숭아와 다알리아가 피어 있는 조그마한 화단의 한 귀퉁이나, 우물 속에서 두레박을 드리우고 물을 긷고 있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꾸부정한 뒷모습, 나팔꽃 덩굴로 덮여 있는 앞집의 뒷담벼락, 연탄과 하숙생의 책 보따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광의 한 구석 - 빠져 들었다. 

그리하여 차라리 아름답도록 무심한 이 세계의 현존, 아무도 거기까지 이르지 못할 신비스러운 고요에 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절망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 고요가 사뿐히 나를 떠받치고 있었으므로.

나의 막다른 처지는 나로 하여금 비로소 내면으로 열린 하나의 창을 갖게 해 주었다.


내가 치는 타자 소리가 '콩 볶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리도록 나는 안간힘을 썼다. 일 분에 백 오십타로 부족하면 이백 타를 치는 흉내라도 낼 것이다. 그러다가 뒤로 벌렁 넘어져 치마가 추켜 올라간다 해도, 나는 이 삶을 부둥켜 안고 씨름할 것이다. 비록 엎어지고 구르더라도 삶 앞에서 가련하도록 정직한 나의 어머니, 나의 선배, 그 밖의 다른 많은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취직을 하느냐 못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총무과장이라는 건대한 조직으로부터, 그 너머의 더 큰 힘으로부터 시험을 받으면서도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보다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내 속엔 몰락이든, 죽음이든, 진창이든, 심연이든, 저 정복되지 않는 생의 영원한 깊이 - 그 소름끼치는 정연을 소리지르지 않고 지그시 바라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 <사다리가 놓인 창>  서영은




10월의 메모장이었다. 

서영은의 단편 소설 두 편을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끼쳤고 지리멸렬한 삶에서 한쪽 다리를 저는, 무섭도록 불완전한 희망을 느꼈다. 적극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희망은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세월은 빠르게 나를 스쳐지나 간다.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너와 내가 함께할 때 더욱 빠르게 나를 침투한다. 



일은 그만두었고 다시 또 백수 생활을 반복중. 그래서 그런가 몸이 많이 아픈것 같다. 위장병도 심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스마트폰 때문에 시력도 많이 나빠졌다. 1.0이었던 시력이 0.5 백수의 장점은 사람이 별로 없는 오전이나 낮시간대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놀란 감독의 신념에 공감이 갔다. 남자 캐릭터 설정도 결국 우리를 울리게 매력적이었고.. 

마미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 나아가 사회 조직에서 살아가야 하는 충돌을 자비에 돌란식으로 표현했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가 연출하는 풍경과 인물은 슬프고 따뜻하다. 한가지 병 혹은 많은 병을 안고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점. 스티브는 그 관계를 절실히 원했지만 사회는 그를 억압했다. 스티브의 손에 의해 스크린이 넓어지면서 스티브는 자유를 외친다. 그 자유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살아갈 자유였지만 동시에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자유이다. 엄마의 상상에서의 스티브가 아니라, 카일라가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는 숨막히는 일상, 고뇌에 대한 자유. 누구도 못말리는 스티브는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 받았던 기억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벗어나려고 한다. 엄마를 향하는 스티브의 마음은 아버지를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섞인 분노의 덩어리일 것이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스티브도, 스티브의 엄마도 우린 모두 착각 속에 빠져 산다. 그리고 절규한다. 풀리지 않을 싸움과, 고독속에서..